스위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빨간 열차의 매력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산악 열차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베르니나 익스프레스입니다. 빨간 차체에 큼직한 파노라마 창을 단 이 열차는 스위스 동부의 휴양지 생모리츠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티라노까지 알프스 산맥을 한 번에 가로지릅니다. 같은 노선을 운행하는 빙하특급이 서쪽 체르마트에서 출발하는 형제 열차라면, 베르니나는 좀 더 작고 단단한 산악 노선 위를 달리는 열차입니다.
저는 처음 이 열차를 탔던 날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생모리츠역에서 차에 오를 때만 해도 호숫가 마을의 평범한 풍경이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자 창밖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 빙하에서 흘러내린 청록색 호수,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가르는 좁은 철길. 사진으로 보던 알프스가 통째로 차창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노선의 기본기,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가
베르니나 노선은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의 생모리츠에서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티라노까지 약 61킬로미터를 잇는 산악 철도입니다. 거리만 보면 짧지만, 고도 차가 1,824미터에 달해 풀코스 운행에 두 시간 반 가까이 걸립니다. 노선 가장 높은 지점인 오스피지오 베르니나역은 해발 2,253미터에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을 통과하는 철도 노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선은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환선이 아니라 양 끝을 잇는 단선 구간입니다. 그래서 어느 방향에서 출발하느냐가 여행의 인상을 크게 바꿉니다. 생모리츠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차창이 점점 따뜻해지고, 티라노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거꾸로 점점 차가워집니다. 둘 다 매력이 다른데, 처음 타는 분께는 북에서 남, 즉 생모리츠 출발을 권합니다. 차창의 색이 변해 가는 흐름을 따라가기 더 좋기 때문입니다.
운행 열차의 두 갈래
같은 선로 위로 두 종류의 열차가 다닙니다. 하나는 정식 명칭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로 알려진 관광 열차로, 큼직한 파노라마 창과 좌석 예약제가 핵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회사가 운영하는 일반 지역 열차입니다. 풍경은 거의 같지만 좌석 예약 없이 일반 운임으로 이용할 수 있고, 자유롭게 내렸다 다시 타기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정이 여유로운 분이라면 일반 지역 열차로 천천히 다니는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 한정된 시간에 이 노선의 핵심을 한 번에 보고 싶다면 예약 열차가 무난합니다. 차창 자리 보장과 좌석 등급에 따라 음식과 음료 서비스가 따라옵니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인다면, 사진을 진지하게 찍을 계획인지부터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약 열차의 큰 파노라마 창은 일반 객차보다 시야가 한층 넓어, 사진을 남기기에는 그만큼 유리합니다.
차창에서 만나는 풍경들
이 노선의 가장 큰 즐거움은 짧은 구간 안에 풍경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점입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호수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지더니, 곧 가파른 협곡과 다리가 등장하고, 어느 순간 만년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집니다.
모르테라치 빙하 구간
생모리츠에서 남쪽으로 약 20분쯤 가면 모르테라치 빙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빙하에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루고, 그 강을 따라 열차가 천천히 올라갑니다. 빙하가 보이는 구간은 열차 진행 방향 기준 오른쪽 창에서 더 잘 보이니,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이 점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오스피지오 베르니나 정상부
가장 높은 지점인 오스피지오 베르니나역 근처에서 차창은 거의 흑백 사진처럼 단순해집니다. 흰 눈과 회색 바위, 그리고 짙은 청록색 빙하 호수만 남는 구간입니다. 이 일대는 한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고, 가을이면 차가운 안개가 자주 깔립니다. 같은 노선을 두 계절에 다시 타도 전혀 다른 여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알프 그륌과 풍경의 전환점
오스피지오 베르니나를 지나 알프 그륌역에 닿으면 차창의 색이 한 번에 바뀝니다. 북쪽으로 보이던 만년설이 사라지고, 남쪽 이탈리아 방향의 푸른 골짜기가 펼쳐집니다. 같은 노선의 같은 자리에서 위로는 빙하, 아래로는 야자수가 자라는 마을이 동시에 보이는 구간이 바로 여기입니다. 작은 휴게 시간을 두는 편이라, 사진을 찍거나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기에 좋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브루지오 나선형 고가교
알프 그륌을 지나면 열차는 빠르게 고도를 낮추기 시작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이 노선의 상징과도 같은 브루지오 나선형 고가교입니다. 평지에서 급한 경사를 만드는 대신, 다리가 자기 자신을 감으며 한 바퀴 도는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동그란 고리 모양이고, 열차 안에서 보면 같은 풍경을 두 번 마주치는 묘한 경험을 합니다.
왜 이런 구조가 필요했나
이 다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산악 철도는 마찰력에만 의지해 오르내리는 점착식이라 경사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바퀴가 헛돌게 됩니다. 베르니나 노선은 톱니바퀴 없이 점착식만으로 7퍼센트에 달하는 경사를 오르내리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고도를 부드럽게 낮추기 위해 선택한 답이 바로 나선형이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다리이지만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매일 열차가 통과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
베르니나선과 자매 노선인 알불라선은 함께 묶여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단순히 풍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20세기 초 알프스 산악 지대 사람들의 고립을 풀어 준 철도 기술의 본보기로 평가받은 결과입니다. 알불라선만 해도 42개의 터널과 144개의 다리가 있고, 베르니나선에도 13개의 터널과 52개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노선이 처음부터 관광 열차로 설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의 마을과 마을을 잇기 위해 만든 생활 노선이었고, 한동안은 운영 적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풍경이 매력으로 재발견되고 관광 열차로 정착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노선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스위스 관광청의 안내가 잘 정리되어 있어 한 번 살펴볼 만합니다.
좌석과 예약, 실용 정보
관광 열차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좌석 예약이 필수입니다. 일정이 정해지면 일찍 잡는 편이 좋고, 특히 여름 성수기와 가을 단풍철은 빨리 마감되는 편입니다. 좌석마다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리를 고르느냐도 중요한데, 이 부분은 다른 노선에도 두루 통하는 원칙이 있어서 기차 좌석 예약과 명당 고르는 법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어느 계절에 갈지부터 정하기
봄과 초여름에는 녹기 시작한 빙하 물이 강을 채우고, 한여름에는 알프스 야생화가 만개합니다. 가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는 낙엽송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짧은 시즌이 있고, 한겨울에는 노선 전체가 새하얀 설경으로 변합니다. 사진을 목적으로 한다면 가을이 가장 변화가 풍부하고, 처음 가는 분이라면 한여름이 무난합니다.
이탈리아 쪽 종점 티라노 활용
열차의 종점인 티라노는 작지만 매력 있는 국경 마을입니다. 이탈리아식 광장과 성당, 짧지만 분위기 있는 옛 도심이 있고, 점심을 먹기 좋은 식당도 많습니다. 시간이 더 있다면 티라노에서 베르가모를 거쳐 밀라노로 이어지는 일반 열차를 타고 도시 여행으로 흐름을 이어가는 일정도 자연스럽습니다. 반대로 생모리츠에서 시작했다면, 여행을 마치고 취리히로 돌아가 도시 일정으로 마무리해도 좋습니다.
다른 알프스 노선과의 차이
알프스에는 베르니나 외에도 빙하특급, 골든파스, 고타르트 같은 유명 풍경 열차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베르니나의 특징은 구간이 짧고, 고도 차가 크고, 풍경의 밀도가 높다는 점입니다. 빙하특급이 여덟 시간 가까이 걸리는 횡단 코스라면, 베르니나는 두 시간 반에 핵심만 압축해 보여 줍니다. 스위스 빙하특급 가이드와 비교해 일정에 맞는 노선을 고르는 것도 방법입니다.
여러 노선을 묶어 알프스 일대를 도는 분이라면 유럽 철도 패스를 따져 보는 편이 좋습니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좌석 예약비가 별도로 붙는 노선이라, 패스가 있어도 사전에 좌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탑승 전에 알아 두면 좋은 점
고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노선이라, 평소 고산증을 느끼는 분이라면 가벼운 두통이 올 수 있습니다. 물을 자주 마시고, 정상부에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는 정도로 충분히 대처됩니다. 사진을 많이 찍을 계획이라면 차창 반사를 줄이는 작은 천이나 후드가 도움이 되고, 여름에도 정상부에서는 기온이 낮으니 얇은 겉옷 하나는 들고 타는 것이 좋습니다.
식사는 좌석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가벼운 간식과 음료 정도는 객실에서 주문할 수 있습니다. 일반 지역 열차로 다닌다면 출발 전 역 매점에서 간단한 빵과 커피를 사두는 것이 무난합니다. 풍경이 아까워 자리를 비우기 싫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짐과 좌석 배치
큰 캐리어를 갖고 타는 분들이 많은 노선이라, 객차마다 짐 보관 구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리에서 멀리 두면 종점에서 짐을 잊고 내릴 수 있으니, 작은 가방 하나는 좌석 위 선반에 따로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진 장비나 갈아입을 옷처럼 도중에 꺼낼 일이 잦은 물건은 그쪽에 모아 두는 것이 편합니다.
두 도시를 잇는 환승
여행을 더 길게 묶고 싶다면 생모리츠에서 다보스 방향으로 빠지는 노선이나, 티라노에서 밀라노로 이어지는 일반 열차로 환승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도시를 환승점으로 삼으면 알프스 산악 노선과 도시 여행을 한 일정 안에 자연스럽게 묶을 수 있습니다. 환승 시간은 넉넉하게 잡는 편이 좋고, 짐이 많다면 같은 역 안에서 옮기는 동선을 먼저 확인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행을 마치며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단순히 풍경 좋은 노선이 아니라, 산악 철도가 만들어 낸 한 시대의 기술과 풍경이 동시에 흐르는 차창입니다. 처음 타는 사람에게는 알프스 입문 노선으로 안성맞춤이고, 여러 번 가본 사람에게도 매번 다른 인상을 남기는 노선입니다. 일정 안에 단 하나의 풍경 열차만 넣을 수 있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 노선을 추천하겠습니다.
이 노선을 두 번째로 탈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같은 풍경이 진행 방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은 한낮에, 한 번은 늦은 오후의 해를 끼고 가 보는 것도 좋습니다. 차창에 떨어지는 빛의 각도가 다르면 같은 산도 전혀 다른 산처럼 보입니다. 저는 한 노선을 여러 번 타보는 습관이 있는데, 베르니나는 그 가운데서도 매번 다른 감상을 안겨 준 손에 꼽는 노선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면 철도 여행 시작하기를 한 번 더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노선을 고를 때 도움이 될 작은 원칙들을 모아 두었습니다. 알프스 외에 다른 산악 노선이 궁금하다면 스코틀랜드 고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여행도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됩니다. 같은 산악 풍경이라도 시대와 기술이 다르면 차창의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함께 느끼실 수 있습니다.